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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오토 브라운의 대장정

마오쩌둥과 오토 브라운의 대장정

주태산 (주)맥스무비 대표

마오쩌둥(毛澤東)이 대장정에 나선 1934년 10월10일,그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마오는 이미 노선투쟁에서 패배하여 당 중앙과 군대 내에서의 권한을 빼앗긴 상태였다.

8만여 홍군의 군사지휘권도 좌경노선인 왕명(王明)의 수하 이덕(李德)에게 넘어가 있었다.

하지만,마오의 세력은 왕명의 지도부를 따라 2만5천리의 노정에 참여했다.

이념적 지향점은 달랐더라도 두 세력은 성공적 장정완료라는 동일한 목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말이 대장정이지 실제로는 국민당 장개석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야 하는 목숨을 건 이동전투에서 이덕은 지휘권을 잡자마자 기존의 마오쩌둥식 전투방식부터 배척했다.

이념이 다른 우파의 전략전술을 답습할 순 없다는 이유였다.

벽안의 독일인으로서 본명이 오토 브라운인 이덕은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아 중국의 군사고문으로 온 탓에 중국실정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도 비정규군으로 거대 정부군과 싸우기 위해 개발돼 실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마오의 전략을 가차없이 폐기시킨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소련군사학원에서 배운 군사교과서에 의존했던 이덕의 방어적 전략은 정부군의 집요한 공격에 무력했다.

불과 45일만에 홍군의 숫자는 3만여명으로 줄었고,연전연패로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래도 이덕의 작전포석은 추호의 수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오측의 거듭된 전술수정 제안은 이념적 저항으로만 받아들였다.

대장정의 완성이란 공동목표를 위해 떨쳐나선 것이라면,전투방식에서까지 이념에 집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노농홍군은 이듬해 1월 마오쩌둥이 권력을 회복하여 중국지형에 맞는 홍군 특유의 유격전과 이동전을 펼친 뒤에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87년말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후보가 당선됐다.

무엇보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런데,노후보는 유세때 “이 사람 노태우 믿어주세요”라며 총 459건의 공약을 내놓았다.

이들 공약을 지키려면 총 400조원이 소요될 정도로 현실성이 부족하여 국민들도 공약실천을 강요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선이후 “나는 잠잘 때도 공약사업 수첩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고 공언할 정도로 공약실천에 집착했다.

주택200만호 건설공약을 실천하려다가 경기과열을 빚었고,국민주보급 약속을 지키느라 증시를 붕괴위기까지 몰고갔다.

말썽많은 새만금간척사업도 그의 공약이었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지상목표로 삼아야 할 대통령과 정부가 오로지 공약실천 그 자체에만 매달리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손자는 “훌륭한 장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군대가 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외에 다른게 없다는 얘기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돌입한 장군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현실은 탁상위에서 세워진 작전계획과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계획서 그 자체에 매달리지 말라는 조언이다.

우리 사회는 일관성에 관한한 조건없이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는 한 우물을 파라고 조언하고,초지일관은 많은 이들의 좌우명이 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와 그를 달성키 위한 수단은 분리해서 생각하는게 옳다.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미련없이 다른 우물을 파는게 현명하다.

사방팔방에 관정을 하더라도 물이 나오도록 하는게 맞다.

뜻을 세웠지만 현실이 불가능하다면,짧은 인생에서 초지에만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전략전술은 현실성을 확보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실적 문제나 상황변화에 관계없이 정권은 선거공약을 얼마나 실천하는 지로,정치인은 정치이념을 얼마나 고수해내는 지로 평가하려는 풍토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정부도 적잖은 선거공약들이 있다.

노대통령의 이념과 노선 또한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이후 노대통령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 현실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걸려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노대통령은 오로지 국리민복의 추구에 정사의 초점을 맞추고,국민들은 그것이 국리민복을 위한 현실적 정책과 노선인지 여부에 대통령평가의 초점을 맞추는게 바람직하다.

노대통령은 또한 그 같은 목표달성을 위해서라면 기본원칙에 부합하는 한 이념과 공약,인맥과 정파까지 아우를 필요가 있다.

중국노농홍군의 1년여에 걸친 대장정은 성공했다.

하지만,이덕의 군사적 교조주의를 비판했던 마오쩌둥도 나중에는 “사회주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키워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잡초론에 집착하다가 문화혁명 10년의 재난을 초래했다.

중국의 본격적인 성장은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猫白猫)의 현실론에 의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목표와 원칙은 확고히 지키되,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을 갖추고 수시로 변화하는 내외부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적응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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